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마 전투 (문단 편집) == 후일담 == [[한니발]]도 포로가 될 뻔 했지만 살아남은 [[카르타고]] 기병과 보병들이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고 후퇴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군대가 참패한 이상 한니발 혼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최후의 희망이었던 한니발까지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 조약은 카르타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 사실상 [[카르타고]]의 모든 군사력을 제한하고 해외 식민지를 빼앗은 것이었다. 여기서 '''[[카르타고]]의 평화'''라는 말이 나왔는데, 패자에게 가혹한 평화조약을 가리킨다. [[한니발]]은 이후 [[카르타고]]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카르타고도 로마와 비슷하게 두 집정관이 해마다 선출되었고 한니발이 이것에 선출된 것이었다. 한니발이 자마 회전에서 졌을 때의 나이가 고작 45세였으므로 아직 완전히 활동을 접을 나이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정력적으로 일했으나 정적들에 의해 한니발이 로마에 복수하기 위하여 세력을 회복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이 로마에 알려졌고,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한니발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한니발은 망명길에 나섰고 이후 시리아로 가서 군사고문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대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했다. 워낙 명성이 높은 장군이라 안티오코스 3세도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맡겼다. 카르타고 장군이 해전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한니발은 수십 년 동안 로마를 육지에서 괴롭힌 장군이었다. 그러고 육군을 제대로 지휘해서 이겼으면 모르겠는데, 안티오코스 3세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처절한 삽질만 거듭하며 '''동방 최강의 군대를 말아먹었다(...)''' 그렇게 [[셀레우코스 왕조]]와 로마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한니발은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이번에는 비티니아 왕의 군대를 조련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나, 여기까지 들어온 로마군이 비티니아 왕에게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을 격파한 것으로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원로원이 지나치게 위대한 개인을 견제한 때문에 말년은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고, 아예 로마를 떠나 시골에서 살다가 기원전 1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도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짐작이 간다.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세력이 축소되던 중에 로마의 사주를 받은 [[누미디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감행했으나 이는 기회만 노리던 로마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카르타고]]는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처참하게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